오늘 한 Youtube 영상시청 중 중국인에게 천안문 노래를 들려주자 크게 화내는 영상을 보게되었다.
천안문 노래를 들은 중국인은 왜 화를 내었는지 의문점이 생겨 알아보고자 하였다.
●천안문사태의 배경
중국 근대사회에서 인민들이 공자와 같은 대인으로 칭송하는 저우언라이가 있었다.
저우언라이는 중국 고대문화와 유적지를 보호하고 문화대혁명으로 지친 인민들을 보살피며 지지층이 늘어나는 가운데 당시 막강한 권세를 누렸던 4인방, 장칭(마오쩌둥 부인), 부주석 왕홍원, 장춘차오, 야오원위안은 자신들의 권력을 빼앗길까 두려워 저우언라이를 적대시하며, 괴롭히기 시작하였고 결국 국정을 무리하게 돌보며, 문화 대혁명을 수습하던 저우언라이는 암이 발병하며 사망하게 된다.
●1차 천안문사태
저우언라이가 사망하게되자 인민들은 큰 슬픔에 잠기며 국가적 추모 분위기가 형성되었는데 위 4인방은 이러한 추모 분위기가 탐탁치 않았고, 저우언라이를 비난하며 추모를 방해하자 인민들은 문화 대혁명으로 쌓인 불만과 4인방의 추모 방해 행태로 폭발하며 1차 천안문 사태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자 4인방은 사태를 수습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동원, 시위대를 강제로 무력해산 시켰고,
이 1차 천안문사태로 여론이 나빠지자 무력진압 결정은 덩샤오핑의 지시라며 죄를 뒤집어 씌워 쫓아내게 된다.
1차 천안문 사태 이후 인민들의 불만은 날이 갈수록 커져가게 되고 4인방의 퇴진을 요구하던 시위가 격렬해지자
이를 지켜보던 마우쩌둥의 후계자 화궈펑은 이들 4인방을 체포하여 투옥함으로써 1차 천안문 사태가 자연스럽게 진정되게 되었다.
●1차 천안문 사태 이후
사태 수습 이후에도 10년동안 이어진 문화 대혁명의 여파는 단기간에 해결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었으며,
화궈펑 혼자서 이를 수습하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4인방에게 쫓겨난 덩샤오핑을 다시 부르게 된다.
이때 공산당 내부에 지지받던 덩샤오핑은 1년뒤 훠거펑과의 권력투쟁에서 이기게 되면서 권력 1선으로 오르게 되었다.
덩샤오핑이 권력1선에 오르며 개혁개방을 골자로 자본주의 체제를 도입하게 시작하였으며,
문화 대혁명으로 인한 악폐습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중국의 근대화, 개방정책을 추진하며 새로운 중국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였다.
공산당 지시하에 실시되던 농업을 개인의 자율에 맡겨 생산량 증대시키며 식량난을 해결하고,
미국과의 수교과정에서 타이완은 본토와 하나의 중국이니 단교를 하라며 요청하게 되면서
다른 여러나라들이 타이완과 수교를 끊게 되는 효과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중국의 주요도시들을 경제특구로 지정하여 서양과의 개방정책을 실시하면서도
자본주의 체제가 내륙으로 퍼지지 않게 함과 동시에 사회주의 체제의 확립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런 개혁개방과 동시에 중앙정부와 거리가 있는 힘이 약한 지방정부와 기업들에게는 일종의 자율권을 부여하여 자체 발전을 유도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중국 무역의 최대 악습 꽌시가 생겨나는 부작용이 생기게 되고 이로 인한 부정부패가 늘어나게 되면서 경제특구와 대도시 중심으로 빈부격차가 심해지게 되며, 인민들이 불만이 다시 늘어나게 되고 공산당 내부에서도 개혁파와 보수파로 나뉘며 더욱 강력한 개방을 할 것인지 체제 내부 결속을 다질 것인지 의견 충돌이 생기게 되었다.
●2차 천안문사태
이러한 분위기 속에 사상해방과 동시에 민주화를 추진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커지게 되었고,
이 타이밍에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다당제 보장, 자유 확대 조치 등을 실시하면서 중국의 대학생 청년들을 중심으로 학생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1989년 4월 17일 청년들을 지지해온 후야오방이 심장마비로 급사하게되며 후야오방을 추모하는 시위가 시작되었는데 후야오방의 급사에는 배우가 있다며 시위가 점점 확산되게 되었다.
1989년 4월 26일 시위가 확산됨에따라 덩샤오핑은 베이징의 시위를 통제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이 날짜를 기준으로 시위에 가담한 모든 사람은 폭도로 규정하게 된다.
1989년 5월 13일 대학생 1천명이 단식투쟁을 벌이게 되면서 시위에 참가하는 인민들은 더욱 늘어나게 되면서 시위의 규모는 더욱더 커지게 되었다.
시위를 통제하라는 지시가 내려진 이후에도 시위의 규모가 작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1989년 5월 20일 덩샤오핑과 공산당은 수도 베이징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계엄령은 선포하였으나 무력사용은 하지않았고 해산을 유도하며 자연스럽게 진정시키고자 노력하였는데 시위대는 이를 묵살하며 더욱 격렬히 시위를 벌이게 된다.
이 묵살을 명분으로 공산당의 강경파들은 시위대를 폭도로 몰며 무력진압을 주장하였다.
결국, 1989년 6월 1일 공산당은 전세계 언론을 제재하며 라이브 방송 및 사진 촬영 등을 금지시키기를 시작으로
1989년 6월 3일 계엄군에게 4일 6시까지 천안문 광장에 모여있는 시위대를 무력해산 시키는 명령이 떨어지게 된다.
이 명령으로 인해 시위에 참가한 대학생들과 일반인민들 등 모든 사람들이 계엄군의 총에 맞거나 탱크에 깔리며 사망하는 참사가 생기게 되고 중국의 뼈아픈 역사로 남게 된다.
천안문 노래는 본래 마우쩌뚱을 찬양하는 노래였으나, 이 천안문 사태를 연상시킨다는 명분으로 금지곡으로 지정되게 되었고, 이후 공안들의 칼 같은 검열을 하고 있어 체포가 될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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